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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기다리는 사람

저는 요즘 기다리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보통은 기다린다고 하면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겠지만 저는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를 기다린다고 하니 마치 세월을 낚는 강태공이나 된 듯하지만 그런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성공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때마다 바뀌는 자연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인생이 짧게 느껴지는 것은 기다리는 게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지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사실 지나간 것은 아득합니다. 내 옆을 지나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지난주 일이 까마득한 과거로 느껴집니다. 이상한 일도 아닐 겁니다.   요즘 기다리고 있는 일은 무언가요? 기다린다는 말은 보고 싶다는 말도 됩니다. 보고 싶으니까 기다리지 보기 싫은데 기다리지는 않겠죠. 아름답다는 말이 보고 싶다는 말이라는 이야기도 일리가 있습니다. 보기 싫은 아름다움은 없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저마다 보고 싶은 것이 다를 테니 말입니다. 일률적인 아름다움은 없습니다. 그러니 나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을 남에게 강요해서도 안 될 겁니다.   저는 기다린다는 말에서 ‘길다’의 흔적을 봅니다. 길다와 관련이 있는 단어로는 ‘기다랗다’가 있습니다. 기다리다와 기다랗다가 닮아서 왠지 기분이 좋습니다. 어원적으로는 더 공부해봐야 하겠습니다만 감정적으로는 두 단어가 이어집니다. 물론 기다랗다는 구체적이고 기다리다는 추상적입니다. 구체적인 상황이 추상적으로 변하는 일은 흔한 일입니다. ‘그리다’가 그림을 그리다와그리워하다의 의미로 나누어지는 것도 그러한 예입니다.   저는 기다림이 많으면 삶을 길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해서 인생을 짧게 사는 사람은 기다림이 적은 사람입니다. 기쁘게 기다리는 일이 없는 사람은 인생이 참 덧없고 허무하고 짧을 겁니다. 기다리면 시간이 느리게 갑니다. 단지 그래서 길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천천히 가기는 하지만 설레는 마음이 있기에 기다림은 내 삶을 의미 있게 만듭니다. 가슴 두근거리며 하루를 살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나요? 어떤 날을 기다리며 사는가요? 저는 요즘 숲길을 걷고 산을 오릅니다. 걸음걸음마다 가장 고마운 일은 주변이 늘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계절마다 내보이는 모습이 달라집니다. 걸을 때마다 기대감이 한가득입니다. 현재를 즐기면서도 미래를 꿈꿉니다. 현재에 충실하라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느낌입니다.     겨울 눈길을 걸으면 새하얀 눈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감탄에 감탄을 거듭합니다. 그러면서도 금방 봄이 오면 이 산에도, 이 길에도 꽃이 필 거라고 기대합니다. 생각만으로도 기쁩니다. 봄이 오면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계곡에 얼음이 녹기를 기다리고, 숲이 푸르기를 기다립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겨울에는 눈을 기다렸는데 이제는 꽃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은 돌고 돕니다. 그러니 기다림에는 끝이 없습니다. 작년에 봤을 텐데 늘 새롭습니다.     사람을 기다리는 것도 비슷할 텐데 우리는 종종 기다림을 놓치고 사람을 놓칩니다. 사랑을 기다리고, 사람을 기다리고, 만남을 기다리고, 웃음을 기다립니다. 새로운 만남에 기뻐하고 오랜 만남을 즐거워합니다. 기다림은 지침이 아니라 설렘입니다. 만약 기다림이 없다면 앞으로 시간이 오는 게 두렵겠죠. 두려우면 당연히 사는 게 힘들 겁니다. 세상을 살면서 기쁘게 기다리는 일이 많기를 바랍니다. 사는 게 기다려지기 바랍니다. 나는 오늘도 걷는 사람입니다. 나는 오늘도 새로움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겨울 눈길 카르페 디엠 요즘 숲길

2022-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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